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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태평양을 건너간 천년 한지, 에이미 리
작성일 : 2021-12-01 조회수 : 1642
Special Report
태평양을 건너간 천년 한지, 에이미 리


한지는 단순히 오래된 종이가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얼이 담긴 소재이기 때문이죠. 한지에 아로새겨진 우리의 DNA는 시공을 초월하나 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지 아티스트 에이미 리(Aimee Lee)를 보며 든 생각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미 전역에 한지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는 ‘한지 전도사’입니다.
 


에이미 리는 페이퍼메이커이자 아티스트, 작가로 활동 중인데요, 놀랍게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는 한지를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2010년 클리블랜드에 미국 최초의 한지 스튜디오를 설립하는가 하면 2012년 한지 책자 <Hanji Unfurled>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 인디애나대학교, 예일대학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죠.
 

하지만 에이미 작가가 처음부터 한지에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한국 문화로부터 멀어진 적도 있었다고 해요. 그런 그녀가 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에서 중국 미술 역사 수업을 들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현장 학습차 방문한 모 박물관 큐레이터가 옛 중국 화가들이 한지를 즐겨 사용했다고 말해주었는데 그때 ‘왜 한국인의 피를 갖고 태어나 그간 한국 문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라는 의문이 생겼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한지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서 종이 공예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미국에서는 일본식 종이 제작법이 더 관심 받고 있었기에 한지를 배우겠다는 그녀의 결심에는 제법 용기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종이 만드는 일에 푹 빠진 그녀는 가평의 한지 공방 ‘장지방’까지 직접 찾아가 한지 제작을 직접 몸으로 익혔습니다. 이후 한지를 활용한 다양한 오브제를 제작하고, 한지 드레스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부부 금슬의 상징인 원앙 목각에서 영감을 받은 ‘Hanji Ducks’ 시리즈는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에이미 리 작가의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지금은 한지발 등 종이 제작에 필요한 도구와 장비를 만드는 장인들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 중이라는 에이미 작가. 그녀는 한지가 매우 귀한 스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한지 덕분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나라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어요. 훌륭한 학생들도 가르칠 수 있었죠. 한국을 더 깊이 알 수 있고 환경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지는 여러 중요한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멋진 선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Interview
에이미 리 작가

 

직접 만든 한지를 사용한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직접 종이부터 제작할 생각을 하게 됐나요?
미국 문화권에서는 필요하는 일을 독학하고 연마하면 자연스레 독립의 기회가 생깁니다. 흔히 예술가들에게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원료와 기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애초에 한지 제작 기술을 혼자 배우고 습득했기 때문에 이것을 직접 제작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반대로 수작업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인들이 아주 훌륭하고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리블랜드에 미국 최초로 한지 스튜디오를 오픈했습니다. 이곳에서 한지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국 현지인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미국인들은 호기심이 많아 한지를 배우는 것에 매우 만족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종이 제작 기술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한국 문화와 역사도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덕분에 요즘에는 한지를 잘 아는 젊은 미국인도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한동안 워크숍을 중단해야 했지만, 조만간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보통 한지 생산에 있어 닥나무를 기르는 데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는데요, 클리블랜드는 어떤가요?
이곳의 기후와 날씨는 한국과 꽤 유사해서 닥나무가 잘 자랍니다. 호수 옆에 있는데다 눈도 많이 오죠. 그럼에도 요즘에는 미국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원료로 한지를 제작하는 것을 연구하고 실험 중입니다. 미국의 원료와 한국의 기술이 합쳐진 종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죠.

작가로서 한지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일단 종류가 다양해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의 범위가 넓다는 것을 뽑겠습니다. 얼핏 종이가 약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매우 튼튼하고 질기기 때문에 섬세한 작품부터 대형 설치 작품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소재이죠.

마지막으로 한지 산업과 문화의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제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이니 한국인들의 관점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려요. 제 생각에 한국은 힘든 시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옛 문화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탄탄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토대가 튼튼해야 하지요. 수백 년간 이어졌던 옛 문화와 전통 공예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한지 산업을 지켜보며 제가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한지를 계승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몸은 고되고 수익은 적으니까요. 장인과 계승자가 사라진다면 좋은 한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한지가 사라지면 소중한 한지 문화와 산업도 사라지겠지요. 한지를 계승할 사람이 없다면 한지를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나 축제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양질의 한지를 발전시키고, 계승할 사람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이고 금전적인 후원이 필요합니다. 한지 교육도 더 활성화해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 공방은 물론 화지 제작을 가르치는 학교도 있습니다. 그 곳들은 외국인에게까지 자신들의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일부 외국인은 일본에 정착해 다른 외국인들에게 화지 제작법을 가르쳤죠. 반면 한국은 한지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울 곳이 요원합니다. 한국어를 모르면 더욱더 배우기 힘든 상황이고요. 지금도 한지를 배우고 싶은데 한국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의 경우, 미국으로 건너와 저에게 배웁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는 한지 문화와 산업을 육성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저도 알고 있지만 길게는 몇 십 년까지 장기적인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미국인들은 한지라는 단어조차 몰랐지만, 지금은 적잖은 예술가들이 한지를 찾습니다.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는 뜻이죠. 빨리빨리, 겉핥기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들여 충분한 후원을 해야만 합니다.

 
[interview] 느슨한 연대의 힘, 용인한지
한지문화산업센터 소식지 제2호 - 전통과 창작 사이, 이 시대의 한지